[충청역사 칼럼] 그 사람 남당 한원진
[충청역사 칼럼] 그 사람 남당 한원진
  • 이 청 논설위원
  • 승인 2019.07.21 15: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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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학문 세계(성리학)의 절대적 위치를 찾이 하는 주자학단에서 가장 큰 문제는 주자의 모든 저작을 한곳에 모으는 것이었다.

믿기 힘들지만 조선 유학자들은 주자의 모든 저작을 다 읽어보지도 못하고 주자를 학단의 종장이자 대선생으로 모시는 입장이었다.  열악한 출판 환경과 정보 수집 능력 때문이다.

이 문제의 해결을 가장 절실하게 원했던 사람이 퇴계 이황이고 해결한 사람이 한원진이다. 한원진은 이이 송시열 권상하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적장자로 이황과는 학맥이 다르지만 주자 저작의 결집은 조선 유학의 전체 희망인 탓에 누가 하든 성과라 할 수 있다.  한원진은 스승 권상하의 유지를 받아 ‘주자동이고’를 완성 드디어 조선에서 주자의 모든 전적을 한곳에 모으고야 만다.

한원진은 존주의 화신이다.

한원진은 주자가 학문적으로 완벽하기에 의문을 갖는 것은 도를 어지럽히는 행동이라 믿었다. 한원진의 조사(祖師)인 송시열은 주자의 학문으로 들어가면 앞뒤가 맞지 않는 점도 있으나 (先生於此亦不逸前後異同) 그것은 사소한 것이다며 주자 학문의 완성을 주창했고 송시열의 절대적 지지자였던 호론(湖論)은 노론 벽파의 사상적 배경이 된다.

호론은 낙론과 분열 하여 갈등하고 경쟁하지만 낙론의 지지자로 조선 6대 성리학자의 한명으로 평가 되는 녹문 임성주는 자신의 학문의 끝에서 낙론 지지를 걷우고 호론의 편에 서면서 2백년 호락논쟁의 종지부를 찍는다.

임성주는 말년에 맹자의 성(性)을 깊게 읽고 호론의 편에 서게 됐다 토로했다.

주자는 공부의 방법으로 맹자를 강조한다. 맹자가 말한 학(學) 즉 공부는 교육의 도이고 도는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求其放心) 이라는 것이다.
호론이나 지금 우리가 말하는 ‘마음 찾기’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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