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역사 시리즈] 역사의 강에서 예산을 조명한다.
[충청 역사 시리즈] 역사의 강에서 예산을 조명한다.
  • 이 청 논설위원
  • 승인 2019.07.1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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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고목이 신목(神木)이 된다.

갑골문자인 한자 예(禮)는 제사를 올리는 술잔의 의미하는 상형자다. 이 주장은 고문학의 대가인 우성오 동작빈등이 고증 하며 일반화되었다. 예가 예의라는 동양적 사고로 인식된 것은 주나라 말기 전국시대 이후 ‘주례(周禮)’로 통용 송나라에 와서 완성된다. ‘주자’의 ‘주례관’에 가장 충실했던 나라가 조선이고 학문이 조선 성리학이다.

한 지방의 지명에 예자(禮字)가 들어간 것은 흔하지 않다. 예산 예천 예안등을 보면 모두 유교가 성행했던 곳이다. 예산은 이미 고려사에 예산현으로 불리던 곳이다. 이산 덕산 대흥등으로 분편 되어 일정기간 이웃으로 기능 했으나 예산은 한국에서 천년이상 지명을 유지한 특별한 경우다.

지금 예산은 생명과학과 문화육성 그리고 슬로스티를 표방한 생태존중의 지역으로 발전을 지향하며 미래로 나가고 있다. 현대는 스토리텔링의 시대다. 복잡다기한 현대인의 삶은 개인 개인에게 고단하고 벅찬 스트레스를 준다. 치열한 경쟁과 타인을 비교하여 나를 평가하는 사회 환경은 자아를 피폐시켜 힘들게 하지만 잠시 눈을 돌려 자연과 과거의 시간으로 산책에 나서는 순간, 우리는 생태의 치유를 받는 감동의 순간을 맞보게 된다. 예산은 생태와 역사 문화적으로 생태치유의 가능성이 갖추어진 군(郡)이다.

역사가 기록의 결과물이라면 예산의 역사는 삼한시대 마한 54국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역사학계의 통설은 마한 54국중 4개국이 예산지역에 있었다 고증한다.

목지국(目支國)=삽교읍 일대.

비지국(막로국)=덕산 일대.

지침국(支侵國)=대흥일대.

여래미래국=신양면(여래미리)일대.

마한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통해 실체를 보여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69년의 기록이다.

12월에 왕은 마한(馬韓), 예맥의 1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가현도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한나라 군사와 힘을 합쳐 싸웠으므로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王率馬韓穢貊一萬餘騎 進圍玄菟城 扶餘王遣子尉仇台 領兵二萬 與

漢兵幷力拒戰 我軍大敗.)

태조는 마한 예맥의 연합군과 함께 한나라를 공격했고 부여가 왕자 구태와 2만 군대를 출정시켜 전투에서 패했다는 것이다. 마한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기에 예의와 염치를 모르는 백제의 왕을 힐난하는 모습으로 등장하다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진다. 학계는 마한은 백제 근초고왕345-375) 시대 54국 전체가 백제에 편입된 것으로 본다.

삼국시대 예산은 웅진 사비 백제의 서쪽지방으로 농산물과 수산물 생산기지는 물론 대 중국 해상 교통로의 요지로 기능하며 불교의 도입과 습합을 통해 정적이고 지혜로운 예산문화를 탄생시킨다. 백제시대 예산지역은 오산현 고산현의 행정명(名)을 부여받아 백제 멸망기 치열한 광복운동의 거점으로 기능했고 후삼국 시대의 천붕통합(千崩通合)의 시대에는 고지전을 벌이면서 드디어 예산의 인물상(像)을 탄생시킨다. 그 사람이 홍유(洪儒 생몰연대 미상)다.

홍유는 배현경 복지겸 신숭겸과 함께 태조의 배향신으로 고려의 개국공신이다. 홍유는 후백제군과 충남 전선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치루며 919년 임성군을 예산현으로 개칭하고 전선에서 유리된 유민 5백호를 모아 읍치를 설치하고 행정체계를 만들어 오늘에 이르게 한 공이 있다. 홍유는 무장으로 수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태조 왕건의 배향신이자 개국공신이 된 사람이다.

홍유는 운주 대흥 웅진성을 저항선으로 버티는 후백제군의 최일선인 예산을 지키고 한편으로 태조 2년 919년 예산현을 역사에 등장시킨다. 홍유는 타고난 무장이자 책사였다. 왕건이 자신이 모시던 궁예를 추방하고 고려를 만들게 된 계기도 홍유가 배현경 복지겸을 대동하고 왕건을 설득했다 고려사 열전은 전한다.

홍유가 예산에 5백호 유민을 모아 생도지망의 대책을 세우면서 한편으로는 후백제와 예산의 지척인 임존성에서 대전투를 치룬다. 1004년 대장군 유금필, 상신 애선 대장군 홍유등을 지휘부로 한 고려군이 ‘나적’이 이끄는 후백제군을 임존성에서 전멸시키며 후백제의 예봉을 꺽는다.

예산현은 이렇게 전쟁의 최일선에서 태어난다. 예산현에 현감(감무)가 부임한 것은 고려 현종 9년 1018년으로 현이 설치된 후 18년후 부터다. 현이 설치된 얼마간 예산지역은 바람 잘날 없었다. 현종시대를 천안 공주까지 유린한 거란족의 침입과 평택 직산 아산 대흥성까지 공략 당했던 몽고의 침입과 1176년 남적(왜구)의 침이 으로 예산 감무(군수)가 살해된 사건은 최명적이다. 절망적이었던 사건은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다. 공민왕 2년 1353년 계사년 왜구의 침입과 우왕 2년 1376년 왜구의 침입이다.

홍주는 순무사 지천보가 왜구에게 살해를 당했고 덕산은 관아가 불태워지는(가야사가 불탄 것도 이때다)등 예산이 직접적 피해를 당한다. 예산은 큰물 내포와 한반도의 북서방향으로 내달리는 금남정맥의 지리환경에 조화를 이루며 천백년 역사를 써온다. 자연(사과) 예산 충절 예산을 예산군청이 주창하는 이유도 그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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