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역사찾기 시리즈] 김옥균의 고향은 어디인가
[충청 역사찾기 시리즈] 김옥균의 고향은 어디인가
  • 이 청
  • 승인 2019.07.11 18: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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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록으로 가장 신뢰할만한 승정원일기에 김옥균 본인이 자신의 출생지를 충청도 천안이라 밝혔다.

김옥균은 풍운아다. 김옥균은 문제적 존재가 역사적 존재가 된 인물로 풍운아란 별명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1882년 갑신정변 이후 일본으로 망명을 해 10여년을 일본을 떠돌며 살다 중국에서 암살을 당한 김옥균의 삶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 김옥균의 일본 생활을 더듬어 그가 남긴 유묵을 모아 전시회를 여는 뜻깊은 행사가 공주 고마나루 문화센터에서 열린적도 있다.

공주는 김옥균이 태어난 고향이고 그가 태어난 생가지도 있다. 김옥균 연보에는 1851년 1월13일 아버지 김병태와 어머니 송씨 사이에서 공주 정안서 태어나 3살이 되던 해 천안으로 이사를 간 것으로 되어 있다. 김옥균의 아버지 김병태는 가산이 기운 탓에 이곳저곳을 수없이 이사를 다닌 듯하다.
 
  그 때문인지 김옥균의 고향인 출생지에 대해 많은 이설이 있다.
  1. 공주 정안.
  2. 대전 이사동.
  3. 옥천군 인포면 도율리.

김옥균은 7살 때 6촌이 되는 김병기의 양자로 들어간다. 김병기는 안동김문의 일원으로 양양부사, 강릉부사, 호조참의 등 내외직을 두루 거친 관료로 김옥균이 비교적 어린 나이로 출세를 하는 뒷배가 된 사람이다.

김옥균의 출생지는 사실 별 이슈가 아닌지도 모른다. 특정된 연보와 생가지까지 있는 마당에 한 사람의 출생지를 따지는 것도 저어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자료가 있다. 정납이 쓴 옥주유고(沃州遺稿)가 그것이다.

정납은 옥천 사람으로 김옥균의 정변 동지였던 인물로서 옥주유고는 그가 남긴 책이다. 옥주는 정납의 호다. 정납은 ‘옥주유고’ 발문에서 “김옥균이 옥천출신이다”라고 밝힌다. 정납은 갑신정변 당시 “정변이 성공하면 자신에게 일본관계 외교담당 전권을 주겠다 했다고 한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자, 옥주 정납은 “화근이 미칠 것을 우려하여 멀리 함경도 지방으로 피신여행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이곳에 정납은 김옥균이 옥천에서 태어났고 김옥균의 처 유씨가 옥천 관노로 있을 때 친척들의 도움을 받았다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김옥균의 처 유씨부인이 기록으로 일부 증언이 있기도 하다.

  남편의 본가에도 포졸이 그물을 풀어놓고 있어 도저히 피신할 곳이 못되어 저는 그곳을 가까스로 빠져나와 굶주린 아이를 달래면서 충청도 옥천으로 발을 옮겼습니다.

  옥천에는 저희 조상의 묘소가 있고 문중 친척들이 살고 있어 잠시 의탁할 요량으로 찾아간 것입니다.

  때는 10월을 지나 동짓달 초순이었는데 한 친척집에 숨어 있다가 옥천관헌에게 들켜서 붙들려 간 곳이 감옥이었습니다.

  차마 말로 다하기 어려운 치욕과 고통을 당하면서 옥에 갇혀 있던 중 우리 모녀에게 뜻밖의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습니다.

  저희 본가시댁에서 종살이를 했다는 정노인이 저희모녀를 옥에서 빼내어 은밀히 집 한 칸을 마련하여 살게 해 주었습니다.

무려 4년 동안이나 그 분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지냈는데 어느날 현청의 공금을 유용했다는 죄목으로 가산이 몰수되고 잡혀 들어가게 되자, 저희 모녀는 또다시 쫓기는 신세로 정처 없이 유랑해야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어디 의지할 곳도 없이 아무런 목표도 없이 포졸들의 눈을 피해 발길 닿는 대로 떠돌아다니다 지친 몸을 의지하게 된 곳은 다 허물어져가는 오두막이었습니다.

굶주렸지만 누구도 밥 한 그릇 선뜻 내주는 사람이 없어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서툰 막일을 나섰습니다.   [명치 28년 3월7일 ‘시사신보’ -1894년]

사실 옥천군에는 옥주유고와 관계없이 김옥균과 연관된 많은 전설과 구전이 있다. 출생지는 물론 김옥균과 깊은 사랑을 하다 끝내 자결을 했다는 기생 명월의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떠돈다.

김옥균의 처 유씨부인과 어린 딸이 옥천에서 관노생활을 하며 고초를 겪을 때 옥천에 살던 김옥균 친척들의 도움이 있었다는 진술을 유씨부인이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김옥균이 옥천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추측케 한다.

그러나 이제 김옥균의 고향을 두고 갑론을박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승정원일기를 통해서다. 승정원일기는 왕과 신하의 대면 기록이다. 1880년 고종 17년 12월 30일 당시 부교리였던 김옥균이 임금에게 휴가를 보내달라 청하며 자신의 출생지를 말한다.

  엎드려 올립니다. 신의 본 생가는 충청도 천안입니다
  副校理金玉均疏曰, 伏以, 臣本生家, 在於忠淸道天安地

무슨 말이 필요한가. 본인이 본인의 입으로 나의 고향은 천안이다 하고 있다. 김옥균은 어린시절 천안과 공주 광정의 경계 지점에서 태어나 성장한 듯 하다. 공주와 그의 고향이라는 말이 이 대목에서 나왔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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