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뱃길은 삼천리 길이었다. 김려가 가고 있는 길은 조선 8로 중 제2로(路)로 동대문에서 함경도를 북동진 하다가 끝내 두만강과 바다가 만나는 꼭지점인 서수라(西水羅)까지 2459리였다. 제4로인 남대문에서 동래 부산에 도착하는 길이 960리길이고 보면 제2로가 얼마나 먼길인지 알 수 있다.김려가 금강산을 지나 흑석령을 넘어 드디어 장백정간(長白正幹)에 접어든 것은 한양을 떠난 지 이십일 만이었다. 하루 백리길을 걷는 강행군이었다. 장백정간은 백두산이 뻗어낸 줄기가 동북방향의 '거문령' '정탐령'을 지나

장지문 밖에서 눈이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이 내리는 소리는 사락사락 버선발이 대청마루를 살짝살짝 걸어가는 소리 같았다. 조금 열려 있는 문틈으로 장승처럼 서 있는 내금위의 튼튼한 어깨가 보였다. 그의 어깨위에도 눈이 내려 쌓여 있었다."바둑이 무엇이냐?""네에...?""너는 바둑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물었다."군왕이 자리를 고쳐 앉으며 물었다. 군왕의 모습은 여유가 넘쳤고 눈길을 따뜻했다. 김려가 대답을 했다."전하, 바둑은 숭례문 바깥의 멍충맞은 서생이 아닐는지요?""뭐라? 니가 야담을 하자는 거는 아닐께고...오라? 하하하.

점심 무렵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그칠 생각을 않고 계속 내렸다. 눈 때문인지 기온은 조금 올라가 있었고 바람도 한결 가라앉았다. 그러나 산곡을 지나는 협로에서는 사방 수십 보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시계는 행군의 가장 큰 적이었다."빨리 가야합니다. 이 협곡만 지나면 마을이 있을 겁니다."나장이 선두에 서서 길을 잡아 나갔다. 작은 키에 뭉뚱한 몸이 잘 길들여진 '과하마'를 연상시켰다."후..."김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힘든 하루였다. 깊은 협곡의 좌우측 산등선의 모습이 하얀 눈속에 진을 치고 야영에 나선 군영(

천인성명(天人性命)이라는 유학의 지음(指音)도 따지고 보면 인문학을 자연과학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유학자들의 노력이다. 유학자들은 세상만물을 허투루 보지 않는다. 그들은 바둑에서도 의리(義理)를 찾아내려 한다. '현현기경'은 바둑이 천문의 반영이고, 역법의 실제이며, 유학의 본령인 주나라의 유훈이 묻어 있는 어떤것이라 말한다. 바둑만이 아니다. 유학자들은 음주가무에도 도(道)가 있고 법(法)이 있다고 한다.술과 춤 그리고 음악과 바둑의 이해는, 유학의 시대 성인의 척도이자 품위의 기준이다. 조선은 더욱 그랬다. 이것을

"이것은 바둑판이 아니요?"박제가가 김려의 옆에 놓인 보자기에 싼 물건을 보고 물었다. 누구라도 보자기의 형태를 보면 바둑판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맞습니다.""호? 담정이 바둑 좋아하는 것은 알지만 귀양길에 바둑판을 챙길 정도인 줄은 몰랐구려.""그게 저..."김려는 박제가의 말에 답변을 하지 못하고 우물우물 했다. 설명을 하자면 사연이 길어 질 듯했기 때문이다."하하, 잘 하셨구료. 바둑이 한갓 도략이기는 하지만 또한 도략에 그치는 것이 아닌 것이 바둑 아니겠소? 세상사 다 마음먹기 나름... 담정, 옛 기보에 말이요."박제가

조용한 친구와 바둑판 마주하고깊은 밤이면 시 한수를 읊네.무릉도원만 별천지라 하리오.한가한 이곳도 그못지 않도다.-김려.(碁爲幽朋着. 詩因靜夜吟. 仙源非別界. 閑處可相尋.)"선생?""선생은 무슨? 담정 어서 오시요. 이리...."박제가는 남의 눈을 의식하고 김려를 주막 안의 한방으로 안내했다. 방안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과 국 그리고 정갈한 반찬이 놓인 밥상이 놓여 있었다."우선 요기부터 하시요. 일행은 저쪽 방에서 접대하라 일렀소.""선생?""자, 앉으시고 금강산도 식후경 아니겠소? 어서..."박제가는 김려를 밥상 앞에 앉히고

김산과 지옥심은 윤필수가 운영하던 '운심방' 앞에서 형사들을 만났다. 형사들은 여러 명이었다. 그들은 열쇠가게 주인을 불러 운심방의 문을 따고 들어가 이것저것을 살폈고 안경을 쓴 사십대 형사가 두 사람을 가까운 커피숍으로 대동하고 가 신원파악에 나섰다."두 분 다 대학 강사시군요? 자 이건 넣으시고요. 나는 박형사라 합니다."자신을 인천 동부경찰서 박형사라 소개한 형사가 수첩에 두 사람의 신분증에서 인적 사항을 옮겨 적고는 신분증을 돌려 주며 말했다."윤선생이 왜 죽었죠?"지옥심이 아직도 현실이 실감이 나지 않는 듯

"풍고는 스펙트럼이 매우 넓은 사람인 거 같아. 당파의 영수이자 세도정치의 본산 그리고 시대 문원의 좌장까지 말야.""조선 안에 안동김문이란 작은 나라를 세운 사람이니 안 그렇겠어?""호호, 과장은... 나는 말야 풍고보다 김려가 더 궁금하더라."지옥심이 '김려'를 말했다. 지옥심은 18세기 전공자답게 당 시대의 문원(文苑)에 깊은 공부가 있었다."무엇이? 김조순과 김려는 동문수학한 친구 아니었나?'"그래. 그 두사람이 봉원사에서 기숙을 하며 글도 쓰고 공부를 함께 했잖아.""그래서?"김산이 장단을 쳤다. 그들

전철이 역사에 들어와 다시 출발할 때마다 철길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듯 했다. 철길의 비명은 가장 낮은 음에서 가장 높은 음까지 무한대의 음파를 쏘아대며 주변을 긴장시켰다. 동인천역은 종점이 아니었다. 항구 쪽으로 한 정거장을 더 가면 남인천역이 있다."요즘 풍고에 대해 뭔가를 준비한다며?"김산이 벤치에 등을 기대며 물었다."응, 18세기 문원의 패트런으로 풍고를 주목하고 그를 조명하는 작업을 해 보려고."풍고는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을 말한다. 김조순은 순조의 장인으로 정조 사후 한 시대를 풍미한 정치가로 그로부터 안동

10시를 조금 넘어 서울역에서 탄 1호선 전철이 오류 부천 부평을 지나 동인천역에 도착한 시간은 12시였다. 동인천은 인천의 구(舊) 도심으로 신축한 역사를 제외한곤 아직도 옛날 80년대의 모습을 간작하고 있었다. 정비되지 않은 작은 골목길과 우중충한 건물들, 무질서한 간판 등이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향수를 느끼게 했다."오 좋네."김산은 동인천역 앞에서, 영종도로 엠티를 가기 위해 바리바리 짐을 챙겨 우루루 내리던 대학동아리 시절이 떠올라 웃음을 지었다. 추억은 언제나 아름다운 것이다. 윤필수가 운영한다는 골동품가게 운심방(雲心房

김산은 홍대입구에 있는 마포평생학습관에서 지옥심을 만났다. 강의가 없는 날이면 학습관 내의 도서관에서 책을 보던 김산이 '연내동'에 사는 지옥심을 불러낸 것이다. 그들은 학습관 1층 로비에 있는 휴게실에서 만났다. 1층 로비의 벽에는 다산 '정약용'의 한시(漢詩)가 커다란 족자로 표구되어 걸려 있었다. 행초서로 되어 있는 족자는 그야말로 흑서백지(黑書白紙)였다.검은 것은 먹이요 흰 것은 종이다,란 말은 무식한 사람들의 무지(無知)를 말하지만 실제로 관공서나 큰 건물에 가보면 초서로 내려 쓴 현판이나 족자

"정조는 부패의 원인을 과거로 보고 초계문신 제도를 둔 게 아닐까요? 교수님은 정조의 초계문신제까지 비판하시는데 이건 아닌 듯합니다."학생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질문을 했다. 김산은 그 학생의 얼굴을 보고 강의록 한쪽에 채크를 한다. 질문의 의도가 신선하다. 강의자들은 간혹 이런 학생이 있기에 반갑다."학생은 조선의 과거제도에 대해 알고 있나? 다음시간 리포트로 '조선의 과거제도 비판' 어떤가?""에이~"김산의 말에 학생들 모두가 비토를 하며 웃는다. 리포트 제출은 모두가 죽을 맛이다."리포트는 역사학보를 찾아보고